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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편하기 위해 용서가 필요하다 (고린도후서 2장 5-11절)

joyful Lia 2023. 4. 2. 16:13
고린도후서 2장 5-11절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출처ㅣ 틴토레토

◀들어가는 글▶

늘 햇빛만을 보며 살 수는 없다. 때로는 비도 오고 눈도 오며 어느 날은 먹구름이 끼기도 한다. 그러나 비가 와야만 무지개를 볼 수 있으며, 구름이 끼어야만 축복의 소나기가 내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위기 상황을 만난다. 그러나 위기는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 있다. 위기를 맞게 될 때 걱정부터 하지 말자. 걱정은 습관이며, 그중 92%는 불필요한 걱정이라고 한다.

 

본문은 근심의 많은 이유들 중에서 '다른 사람' 때문에 겪는 근심을 말한다. 본문의 배경이 된 고린도교회는 물질의 풍성함과 함께 성령의 역사도 풍성한 교회다. 다시 말해, 삶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풍성한 감사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근심'으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음이 사도 바울의 눈에 보인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근심의 대부분의 이유를 5절에서 언급한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근심을 덜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울은 하나님도 우리에게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으신다고 말씀했다. 오히려 근심하는 자를 위로하신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용서받은 자'의 특권이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이 특권을 누려보는 시간이 되길 축복한다.

 

 

1.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근심을 준 결과(6절)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은 '변리'를 행하는 것에 대하여 단호하게 말 하셨다. 잠 28장 8절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자기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가난한 자에게 변리를 행하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근심을 주는 일이다. 정당한 소득이 아니기에 자신에게 결국 복이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근심을 주었기에 그 원망의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되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했다. 

 

이러한 정당치 못한 방법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성행했다. 그것은 성전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 왜 예수님께서 은혜의 장소인 성전에서 분노하시며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는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은혜의 장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이다. 마 21장 12절 '예수계서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어떻게 강동의 소굴이 된 것인가? 마 21장 13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성전에서 기도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가난한 자들의 마음에 근심을 하나님은 강도의 소굴을 만든 자들에게 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근심하는 자와 함께 근심하라고 말씀했다. 그런데 자기의 유익을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근심을 주는 자를 하나님이 그대로 두시겠는가? 본문 6절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벋는 것이 마땅하도다'

 

2. 이 결과가 나에게 주는 깨달음 (7-8절)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상대방이 처벌로 인해 근심하는 것을 보며 우리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편함과 근심이 생긴다면 이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해결법은 아니라는 증거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예수님의 해법은 돌로 치려던 자들에게 돌을 내려놓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돌을 내려놓은 이유가 '돌로 치려던 여자와 자신들의 삶이 똑같음'을 그들의 삶에서 깨달은 것이다. 

 

 

3. 용서, 나를 편하게 하는 하나님의 마음(9-11절)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1) 용서는 순종의 영역이다 (9절)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일만 달란트의 용서가 백데나리온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나 중심의 욕심' 때문이다. 결국 용서는 나에게 욕심이 생기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에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신 예수님의 용서다.

 

2) 용서는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10절)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할 수 있는 용서 vs 할 수 없는 용서

 

우리는 죽어도 할 수 없는 용서를 가슴에 담고 산다. 본문에서 에수님은 일어난 일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했다. 우리는 상대방이 한 일을 용서할 수 없다고 기억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을 용서하면 자연스럽게 그 일도 용서가 된다. 

 

예수님의 트레이드 마크가 있다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일 것이다. 이 말은 상대방의 일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의 사함만 받은 게 아니다. 우리 자체가 용서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의 행동에, 잘못에 제한을 두고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를 사랑하고 용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과 소금 되어할 일은 '차별과 구분'으로 내 편에게만 좋은 행실이 아닌 누구든지 빛과 소금의 유익을 즐길 수 있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나가는 글▶

 

용서가 쉬운 사람은 없다. 더욱이 억울하게 겪는 근심을 벗어내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근심케 한 사람을 내가 편하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 

 

11절은 그 이유를 말한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바울은 '사탄에게 속지 않으려면' 용서하라고 말했다. 그렇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정직하고 옳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사탄에게 속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속지 않으시려고 당당하게 자신의 생명을 용서해야 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내놓으셨다. 목숨보다 귀한 게 있는가? 그렇다면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억울한 근심들로부터 목숨보다 덜 귀한 우리의 손해 때문에 아파하지 말자. 그리고 오히려 10절 후반절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일'로 영적인 사이즈를 키우는 대범한 믿음의 용사들이 되자. 우리의 이런 행동에 사탄은 기겁하고 물러갈 것이다. 또 한 번의 영적 성숙을 이루는 '용서하는 자로 삽시다!'라고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자.